2009년 6월 20일 오후 5시, 칭다오대학교 공연장으로부터 베토벤 제9번 교향곡의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맑고 깨끗한 음색은 시냇물이 흐르듯 가볍고 경쾌하게 흐르며 듣는 이의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만일 공연장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이 연주의 주인공이 손가락이 네 개뿐인 음악가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한국에서 날아온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그녀의 이름은 바로 ‘이희아’다.
선천적 장애를딛고
先天残疾
1985년 7월 9일, 희아는 서울에서 출생했다. 어린 아이의 탄생은 종종 가정에 큰 기쁨을 가져오기 마련이지만 희아의 경우엔 달랐다. 그녀는 선천성 사지기형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던 것이다. 태어날 때의 몸무게는 2.5킬로그램에 불과했고 양 손에는 손가락이 두 개씩 밖에 없었다. 관절이 없는 손가락들 중 세 개에는 뼈조차 생겨있지 않았다. 게다가 가늘고 연약한 종아리는 몸을 지탱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세 살 나던 해에 희아는 무릎 아래의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또 정상인보다 낮은 지능 탓에 그녀는 한 살이 넘도록 말을 떼지 못했다. 두 살 되던 해 겨우 앉을 수 있게 되었고, 다섯 살이 되어서야 무릎으로 뒤뚱거리며 걸음마를 깨쳤다. 하지만 양손에는 여전히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스스로 해내는 것은 희아에게 여전히 불가능했다.
희아가 태어났을 때, 그녀의 할머니는 아이에게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입양을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희아의 엄마인 우갑선 씨는 아이를 키울 것을 고집하며 말했다. “희아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과도 같아요. 내가 아이에게 생명을 준 이상, 반드시 강한 아이로 키울 거예요.”
시간이 흐르면서 비록 또래 아이들보다 지능 발달이 조금 더디긴 해도, 명랑한 성격과 밝은 미소를 가진 희아는 점점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로 자라났다.
엄마는 딸의 이름을 열 살에 세상을 떠난 가여운 성녀 히아신타의 세례명을 따 ‘희아’라고 지었다. 기쁠 희에 새싹 아, 세상에서 기쁨의 싹이 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포기란 절대 없어
青春无暇
훌륭한 피아노 연주자는 특별한 테크닉과 강인한 체력, 의지력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열정과 창의력까지 고루 갖추어야 한다. 정상인에게도 이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인데도 선천성 기형장애 1급 장애인인 희아가 피아노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엄마는 피아노를 치면 힘없이 풀리는 제 손가락에 힘이 생기고, 지능 개발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어요.” 희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하지만, 희아가 피아노와 함께 걸어온 18년의 세월은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았다.
당초 여러 번의 좌절을 겪고 나서야 엄마는 겨우 희아를 가르치겠다는 선생님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희아는 인지력이 낮아 악보를 읽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엄마는 희아가 곡 전체를 외울 때까지 한 음 한 음씩 가르쳐 나갔다. 하지만 훨씬 어려웠던 것은 건반을 연주하는 일이었다. 희아의 네 손가락은 건반 하나를 누를 힘조차 없었으므로 한 곡을 치는 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상상을 뛰어넘는 노력과 강도 높은 훈련의 결과, 희아의 네 손가락에는 점점 힘이 생겼고 건반 두 개를 동시에 누를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해졌다. 종아리와 발이 없는 희아가 페달을 밟을 수 있도록 엄마는 희아를 위해 설계된 특수한 장치를 무릎에 달아주었다.
어린 시절의 희아는 엄마의 고충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했기에, 자신이 피아노를 열심히 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매일 10시간의 연습은 그녀의 생활에서 빠지지 않는 주요 일과가 되었다. 5분 30초 길이의 즉흥교향곡을 연주하기 위해 희아는 열 두살부터 열 일곱살까지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희아의 회상에 따르면 그 때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우울했던 시기였다. 피아노 선생님의 모습만 보아도 그녀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고, 때로는 피아노에 손만 대도 기절하곤 했다. “그때, 엄마는 정말 제게 독하게 하셨어요.” 하지만 여기에 희아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엄마에게 감사해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제가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어요?”
지금 희아는 한국 재활복지대학 멀티미디어 음악과에 재학중이다. 강의가 없을 때면, 다른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희아도 자신만의 여가생활을 즐긴다. “피아노 외에도 저는 노래와 춤, 컴퓨터로 채팅하기, 친구와 문자 보내기를 즐겨요.”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냐는 질문에 희아는 사춘기 소녀처럼 잔뜩 들떠서 대답했다. “’꽃보다 남자’의 F4와 홍콩 배우인 리밍(黎明)을 좋아해요.”
타인의 눈에 희아는 그저 한 장애인에 불과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아의 세상에서 그녀는 모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동등한 존재다. 카메라 렌즈 앞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양손을 숨기지 않고 한 손은 턱 아래, 다른 한 손은 허리에 갖다 대며 재치 넘치는 포즈를 선보였다. 희아는 자신있는 목소리로 음악을 그녀만의 ‘화장품’에 비유한다. 음악만 있으면, 자신이 더없이 예쁘게 보인다는 이유에서다.
음악, 도시를 깨우다
震撼岛城
희아의 소망은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되어 유명해진다거나 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행동을 통해 많은 장애우들에게 “운명을 원망하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때 운명도 비로소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희아의 세계 순회공연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6월 20일, 그녀가 칭다오로 날아왔다.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연주가 끝나고, 뒤이어 희아는 한국 민요‘도라지 타령’과 ‘아리랑’을 연주했다. 한 개의 손가락이 두세 개 손가락의 역할을 해야 하는 탓에 희아의 네 손가락은 흑백의 건반 위에서 날개라도 단 듯 쉼없이 춤추었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그녀의 손가락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에 한 번 감동하고, 생명의 한계를 넘어선 드라마틱한 인간 승리에 또 한 번 감동을 금치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희아를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저는 희아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피눈물 어린 노력이 일궈낸 후천적 천재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연주회가 중간에 접어들었을 때, 희아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객석을 향해 이야기하는 동안, 희아는 유머러스한 동작을 곁들여 보이며 관객들의 웃음과 박수를 자아냈다.
연주회가 후반부로 접어들자, 희아는 중국 관객들을 위해 중국 가요인 ‘위에량대뺘오워더신(月亮代表我的心)’과 ‘티엔미미(甜蜜蜜)’을 직접 노래했다. 노래하는 희아는 음악에 한껏 취해 가수의 음색을 모방하기도 하고, ‘프로’다운 모습을 뽐내듯 무대 위를 오가며 마이크를 객석 쪽으로 향한 채, 서툰 중국어로 ‘여러분 함께 불러요’라고 외치기도 했다. 무대와 객석이 하나된 열띤 분위기 속에서 관객들은 그녀의 노래에 크나큰 박수를 보냈다.
“박수 소리가 들릴 때 저는 가장 행복해요.” 인터뷰 도중 희아는 이렇게 말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제 자신이 정말 행운아 라고 느껴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