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45인의 칭다오 출신 배우들이 열연을 펼친 영화 ‘먼지를 찾아서'가 시사회에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영화는 칭다오에 실존했던 주인공‘먼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평범한 시민 '먼지'는 익명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 선행을 베풀어왔다. 쓰나미 재해, 중국 후난성 홍수 재해를 비롯해 사스 피해가 발생했을 때 그는 피해지역의 아동 병원과 고아원에 수차례 기부를 했다. 그의 선행은 더 많은 사람들이 공익 사업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계기가 됐다. 이제 칭다오에서 ‘먼지'라는 이름은 나눔을 의미하는 상징처럼 여겨진다. 이처럼 지난 60여년 동안 소리 없이 세상을 바꾼 사람들은 많은 중국인들에게 올바른 행동양식과 삶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레이펑 동지를 본받자'
学习雷锋好榜样
‘레이펑 동지를 본받자, 그 인내와 검소함 잊지 않으리…' 중국의 젊은 세대들은 레이펑을 찬양하는 노래를 들으며 자라왔다. 중국에서 ‘레이펑'이란 타인을 돕고 사랑하는 선행의 대명사다. 레이펑이 살았던 50년대, 겨우 몇 년에 불과했지만 그가 남긴 선행의 발자취는 모든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절약, 근면, 희생', 자칫하면 공허하게 들리는 단어들이 레이펑에게는 삶 그 자체와 같았다. 재해 지역에 자신의 저축을 기부하고, 묵묵히 땀흘려 노동하며, 밤이 늦도록 전우의 해진 군복을 한 땀 한 땀 기워나갔던 그의 마음은 오늘날까지 남아 평범한 이들의 일상에 샘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1962년, 22세의 레이펑이 사고로 희생되자 중국 전역에서 10만이 넘는 추모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1963년, ‘레이펑 동지를 본받자'라는 제목의 마오쩌둥의 글이 발표되면서 전국에서 그에 따른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당시 국가지도자였던 리우샤오치, 저우언라이, 주더와 덩샤오핑이 모두 같은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 것은 당시로서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렇게 ‘레이펑 정신'은 중국인의 마음 속에 희생의 대명사로 깊숙이 자리잡았다. ‘레이펑을 본받자'를 모토로 했던 운동은 점점 열기를 더해갔고, 수십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에게 이타심과 희생정신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 후, 중국에서는 3월 5일을 레이펑 기념일로, 또 3월 한 달을‘봉사의 달'로 지정했다.
베이다황, 가난한 자들의 꿈
北大荒,艰苦的梦想
국가 경제 건설이 확대되고 중국인들의 참여 열기가 고조됨에 따라 집단 노동 활동이 전국 각지에서 시행되었다. 자수성가의 경우를 포함해 많은 노동자들은 ‘가난과 무소유’를 바꾸기 위한 사업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베이다황 개발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사례로 꼽힌다.
베이다황이란 중국 동북의 광대한 무인개발 황무지를 가리킨다. 20세기 50~70년대에 선후로 80만이 넘는 제대군인이 군인이나 농민 혹은 지식인으로 전업했고, 이들은 나라에 도움이 되고자 베이다황으로 가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대규모 국영농장을 건설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베이다황은 연간 70억kg의 국가 중요 양식생산 기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중 대두의 생산량은 전국총생산량의 37%, 옥수수 생산량은 전국의 53%에 달한다. 초기 베이다황인이 얼음을 깨고 눈을 녹이며 흘린 땀방울이 과거의 ‘베이다황’을 지금의 ‘베이다창(仓)’으로 만든 이야기는 유명하다.
1967년부터 오늘날 베이다황 바오췐링 고등학교 교사 루지홍은 ‘베이다황'이 한창이던 시절 교육에 전념했던 일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1978년 베이다황에 주둔하던 지식청년들의 귀향바람이 불었다. 수십만의 지식청년들이 연이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루지홍과 보창웬은 끝끝내 남아 교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베이징으로 돌아간다면 분명 교사로서 좋은 대접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결국 남아서 맡은 바 소임을 다 하겠다고 결정했다." 루지홍은 베이다황 박물관 로비에 있는 25m가 넘는 벽에 12,342명의 개척자의 이름들을 빽빽이 새기고, 그들을 ‘영원히 잠든 베이다황의 전사'라 명명했다. 이곳에 새겨진 이름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이름이지만, 그들의 이름은 모이고 모여 결국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나누면서 커지는 사랑
志愿者:送人玫瑰,手留余香
올해 춘절 경축회에서 베이징 올림픽 지원자들이 연기한 콩트는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무대 위 지원자들의 익살스러운 표정에서는 잔잔한 삶의 향기가 묻어났다. 2008년에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은 ‘지원자'라는 이름을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 2008년 한해에만 500만이 넘는 지원자들이 자연재해 피해지역에서 구호활동을 펼쳤다. 스촨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해외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렇게 보도했다. "중국에서 일어난 이번 참사는 매우 유감스럽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지원자'라는 집단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5월 14일 저녁 9시경, 피해자들의 시신이 안치된 진양 쓰췐 피해구역 지우저우 체육관에서 8시간여를 쉬지 않고 일했던 후카이화는 갑자기 쓰러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지금 지우저우 체육관에 있는데, 몹시 바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잘 들리지 않으니까,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구." 이것은 57세의 후카이화가 가족과 주고받은 마지막 통화내용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1993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이 처음 지원자 봉사활동을 개시한 뒤, 전국적으로 2억 6,800만 명의 중국인들이 총 61억 시간에 이르는 봉사활동을 벌여왔다. 올해까지 중국이 제정한 지원자관리방안에 따라 등록한 지원자의 수는 이미 2511만 명을 넘어섰다.
리쟈화 중국 청년 정치학원 부원장은 지원자들의 행위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레이펑 정신을 계승하여 선행을 생활화하고, 봉사활동의 활성화를 통해 사람과 사람간의 정을 보다 두텁게 하며, 조화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자신의 땀과 노력을 희생하는 중국 지원자들의 가치실현이 점점 인정 받고 있다."